[비경계성의 사회] 통합진보당 해체를 결정한 대한민국의 현주소
Journalist : changjo | Date : 14/12/23 9:32 | view : 279298     
 

눈에 눈물이 들어가서 눈물을 흘리면
눈물이냐? 눈물이냐?

어디까지가 강이고 어디서 부터가 바다냐?

이런 질문들은
얼핏 봐도 쓸데가 없는 질물들 같아 보인다.
그렇다. 불필요한 질문이 맞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있어서는
이런 질문들에 수 없이 대답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하였다.
아니,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중세 '보편논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싸움의 종교버전이다.
- 여기서 보편논쟁을 다루진 않겠다 -
이 둘 중 어느 한 편을 택하라고 하면,
이 세상은 싸움 투성이가 되고 말 것이다.
실재론과 유명론 모두 편을 가를 입장이 못된다.

중요한 것은 현상학적 판단이다.
그리고, '지켜 보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는 이쪽 편으로 '너'라는 저쪽 편을 버리지 않게 된다.

경계가 강한 사람일수록 성숙하지 못함을 본다.
공자가 60에 '이순'이라고 했던가!
알고 보면 편 가를 문제가 아님을 보게 된다.

편 가르는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강은 강이고 바다는 분명과 강과 다르다.
하지만, 그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어차피 강은 강일테고 바다는 바다일텐데,
그 경계를 가르는 것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중세 십자군 전쟁의 명분은 종교적 명분이다.
즉, 성지회복이라는 명분에 군중들이 움직였다.
그러나, 진정한 십자군 원정의 목적은
각 기득권자들의 입장에 따른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이 모습은 통합진보당 해체를 바라보는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명분이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장장 40여분을 읽어내려간 판결문 내용대로라면
그 어느 당도 해체를 모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도, 많은 대중들은 국가 안위라는 명분에 안도한다.

여기서 우리 군중의 할일이 있다.
각자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의 담론'을 내려놓고
그 두려움이 우리를 몰아간 '막연한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용한 곳에서 과연 그러한지를 물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기득권 세력이 만들어 놓은
'공포의 덫'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중세 십자군 전쟁의 대상인 이슬람은
처음에는 '경계 밖의 존재'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진행된 11세기말 ~ 13세기의 시기는
오히려 이슬람의 문물과 문화, 지식이 전파되는 시기였다.
그야말로, 기득권 세력이 노렸던 숨겨진 목적이 이뤄지는 시기였다.
교황청은 동방정교회를 서로마 관할권 아래 흡수하려하고,
서유럽 내 상속권이 없는 영주들의 아들들은 미지의 땅이 필요했고,
도시 상인들은 시장 개척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이들의 각각 숨겨진 욕구가 만들어낸 사단의 세력이 이슬람이었다.

이들의 욕구는 얼마나 채워졌을까?
한 마디로 십자군 원정은 실패했다.
성지회복은 커녕 이슬람 뿐만 아니라,
기독교내에서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골은 깊어졌다.
서유럽 1000년 동안의 유대인 대학살의 시초가 된 타종교에 대한 증오가 커졌다.
즉,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었던 '경계성의 강화'는
결국, 경계성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우리는 중세 십자군 전쟁의 역사와 통합진보당의 해체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비경계성'이라는 담론을 떠올려야 한다.
표면적 명분이나, 숨겨진 욕구에 설왕설래 할 필요 없다.
우리 각자 내면 안에 있는 '경계성의 함정'을 들여다 봐야 한다.
그리고, 비경계성의 여유와 폭넓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비경계성의 성숙이 나를 포함하는 다양성을 지킬 수 있다.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저것의 경계밖에서는
나도 살 수 없다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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